그동안 스웨덴에서 산 지 1년, 2년, 3년, 4년이 될 때마다 글을 썼지만 5라는 숫자만큼 묵직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스웨덴으로 이사온지 5주년을 맞이하여 뭔가 길게 쓰고 싶어서 글을 고치고 고치고 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올리지 못하고 그렇게 4월 27일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동안 썼던 걸 지웠다. 너무 대단한 의미를 부여했나,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산지 3년이 되었든 5년이 되었든, 어쨌든 다가올 하루하루가 여전히 모험과도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요즘 하는 생각들을 랜덤으로 써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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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에 오기 전에는 막연하게 '가면 한국음식이 많이 먹고 싶을까? 가족들과 친구들이 많이 보고 싶겠지?'하는 생각을 했었다. 뭐... 사실이긴 한데, 솔직히 지금 제일 그리운 건, 한국의 계절이다.
3월에 한창 꽃샘추위로 추웠다가 갑자기 거짓말처럼 날씨가 따뜻해져서 봄옷을 찾아입게 될 때, 그 때 느꼈던 감정이 너무 그립다. 옷장에서 막 꺼내서 입은 봄옷냄새라든지, 갑자기 확 느껴지는 봄밤의 냄새라든지. 갑자기 목련이 피고 벚꽃이 피고 그러고 나서 영산홍이 빨갛게 피는 것을 보는 게 그립다. 5월이 되어 거리에 연등을 쫘악 매달아놓은 걸 볼 때마다 '흠, 내 탄신일이 돌아오고 있군'하고 생각했던 내가 그립다. 내가 가졌던 모든 봄가디건들이 그립고, 티셔츠에 대충 얇은 가디건 걸치고 나가도 춥지 않은 5월이 그립다.
한국에는 늘 여름에 갔고 작년에도 두달 내내 장맛비를 보고 왔으므로 여름이 그리 그립지는 않다. 하지만 올해 여름에 한국에 못가니까 아마... 올 가을과 겨울에 열심히 또 한국여름이 그립다고 징징댈것 같기도 하다. 가을은, 스웨덴 가을과 한국 가을이 좀 비슷한 느낌이라 그렇게 그립지 않다. 겨울은 더더욱 그립지 않은 것 같지만 가끔 과메기나 굴 생각이 날 때가 있다. 아 그렇구나, 나 제철음식을 그리워하는 건가? 냉이국과 달래장을 먹어본 게 도대체 언제인가.
이수해야할 학점을 미리 들어놓은 게 있고 그래서 내년 봄학기는 학점을 다 안채워 들어도 돼서 좀 여유롭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예 일찌감치 4월에 한국에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뭐, 그때가면 또 다른 계획이 생기게 될 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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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에 온지 2년쯤 되었을 때, 우연히 한 중국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억양과 발음이 퍼펙트한 스웨덴어를 구사했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스웨덴 사람들이 '아 얘는 스웨덴에서 나고자랐구나'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알고보니 스웨덴에서 산지는 5년밖에 안되었고 처음 왔을 때는 스웨덴어를 아예 모르는 상태였다고 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었다. 그때부터 그녀가 나의 롤모델...까지는 아니지만 (절대 내 발음이 그렇게 될거라고 기대하지 않으므로) 공부하면서 '이거는 내가 자꾸 까먹고 자꾸 틀리는 부분인데 그냥 포기하고 모르는 채로 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때면 그녀의 스웨덴어를 떠올렸다. '귀찮은 걸 자꾸 해야 한 언어를 마스터할 수 있겠지'라며 마음을 다잡게 해준 그 중국친구과는 의외로 공통의 친구가 있어서 종종 만나고 있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그녀의 스웨덴어에 감탄한다.
많이 부족하지만 나 역시 스웨덴어를 나름 빨리 배운 편이고 재작년 정도까지는 '와 그런데 벌써 스웨덴어를 그렇게 잘해요'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5년쯤 살면 그런 소리는 더이상 듣지 않게 된다ㅎㅎㅎ 잘하면 잘하는대로 "아, 5년 살았으니까 그렇구나"라는 말을 듣게 되고, 못하면 못하는대로 "아 아직 5년밖에 안살아서 이런 말은 모르나?"라는 말을 듣게 되는 그런 5년. 지금으로부터 또 5년이 흘렀을 때 내 스웨덴어는 어떠려나...라고 생각하면 진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그런데 정말 이쯤되면 스웨덴어를 따로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다. 나는 학교공부를 해야하니까 언어공부할 시간이 없고, 일하시는 분들은 일을 하니까 따로 언어공부할 시간이 없을 거다. 육아하시는 분들은 또 얼마나 바쁘랴. 학교공부나 일을 스웨덴어로 하면 아무래도 학교나 업무상 배우는 어휘나 표현들이 있긴 하겠지만, 한단계 업그레이드를 시키려면 결국엔 시간을 내서 언어공부를 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_<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정말이지, 언어는 SFI부터 시작해서 콤북스에서 스웨덴어 수업듣는 그 동안은 정말 엄청나게 최선을 다해서 빡세게 공부하는 게 좋은 것 같다. 지금이 지나면 스웨덴어 공부할 시간이 없다는 그런 생각을 왜 그땐 안했을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언어의 유창함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감 문제가 아닌가 싶다. 팬데믹 때문에 줌으로 조모임을 하고 줌으로 발표를 하고 줌으로 조교와 이야기를 하고 줌으로 일을 하고... 몇 주 전에는 여름인턴 면접도 줌으로 봤다. 그동안 집사람은 '내가 매우 심적으로 편한 상태에 있을 때 하는 스웨덴어'만 듣다가, 요즘에는 내가 '별로 편하지 않은 사람들과 스웨덴어로 말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안 편한 사람들이랑 스웨덴어로 말할 때 정말 딴사람같다, 당당해보이지 않고 위축되어보인다' 말하곤 했다.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학교에서도 친한 친구와 말할 때는 목소리도 좀 커지고 발음도 분명하게 하게 되는데, 오히려 잘 모르는 사람들과 조모임을 하면 스스로도 발음을 그냥 뭉개고 조금 소심하게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면접보기 30분전에 위스키 마신 거 안비밀... 술기운이 올라와서 뭐랄까, '아, 내가 지금 이 나라 말로 해주잖아! 이걸 회사가 고맙게 생각해야지, 내가 쫄 필요는 없지! 못알아들으면 다시 물어보겠지 뭐!'하는 마인드로 그냥 아무말이나 뱉었더니 결과가 좋았다..... 그래. 내가 키워야할 건 자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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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운이 좋아서 여름 인턴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종종 이용하던 오디오북 회사인데 이번에 이력서 돌리면서 가장 간절하게 '여기 꼭 되면 좋겠다' 했던 데라서 기대가 된다. 게다가 유급인턴이라 신난다 야호. 하지만 나는 한국에서도 인턴을 해본 적이 없고, 내 친구 중에는 인턴을 해본 사람이 거의 없어서 주워들은 게 없으므로... 인턴으로서의 생활이 전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차라리 신입이면 한국에서 회사생활하면서 첨에 어땠더라, 내가 신입한테 어떻게 했더라, 뭐 이런 게 생각이 날텐데... 한국에서 다녔던 회사는 인턴같은 게 없었어서 보통 인턴한테 어떤 걸 가르치고 어떤 업무를 주는지 전혀 모르겠다. 게다가 IT직군에서 일해보는 건 정말로 처음이라 이 분야 사람들은 일을 어떻게 하는지 더더욱 모르겠다. 멘토가 될 분한테 면접 때 물어보긴 했는데 그분도 아직 나한테 뭘 알려주고 뭘 시킬지 아직 자세히 생각을 안한 것 같았다. 코로나 때문에 인턴십도 아마 재택으로 하게 될 것 같은데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면 좋겠다.
아 그러고보니 회사 내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영어로 하게 될거라고 했는데 나는 정말로 영어로 일해본 적이 없다. 음... 옛날에 잠깐 호스텔 알바했을때? 하지만 그땐 일본인 손님이 더 많아서 일본어를 더 많이 했지. 스웨덴에서 했던 모든 알바는 영어를 할 일이 없는 일들이었고 학교에서도 스웨덴어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았다. 앞으로 마지막 2년은 학교에서도 영어로 수업을 하게 될 거고 인턴십도 영어로 하게 될거라고 하니 이제 나의 영어 스피킹과 리스닝 실력을 좀 점검하고 다듬어야할 것 같은데 아마 안할거야, 귀찮아서 안하겠지...... 늘 이렇게 걱정만 하다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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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생활은 뭐... 똑같다. 과제는 늘 있고, 하나를 끝내면 또 다른 게 생기고... 그러다보니 이제 한달 있으면 3학년도 끝이다. 이상하게 이 프로그램에서는 학부논문을 안 쓰고 바로 석사과정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래서 아마 누가 '학부생이에요 석사과정생이에요'라고 물어보면 되게 애매해질 것 같다. 학부논문을 안썼으니 학사학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바로 대학원생이라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웃기다.
이제 남은 2년동안 뭘 전공할지를 정하고 앞으로 들을 과목들을 정해서 수강신청을 해야했는데 이게 꽤 골치였다. 왜냐면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기 때문이지! 컴퓨터공학에 대한 엄청난 관심이 있어서 이짓을 시작한 게 아니라 그냥 돈 많이 번대서 이걸 택한거니까 나에게 그런 전공에 대한 애정과 관심따위 있을리가 없지! 원래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을 고를 생각이었는데 조모임이 너무 많아서 망설여졌다. 게다가 2-3월에 팀플 때문에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면서 더더욱 고르기 싫어졌다. 그 와중에 친구가 함께 인공지능을 선택하자며 꼬셨는데 그건 뭐 죄다 수학과 통계다. 내 지난 3년동안 수학 지긋지긋하게 했는데 남은 2년 또 수학공부하다가 졸업하라고?라는 생각이 들어 고민을 했다. 팀플이나 수학이냐. 하지만 나는 늘 친구따라 강남가던 사람이므로 이번에도 어김없이 친구따라 인공지능을 선택하고 말았다. 그래 뭐... 지금까지 3년도 어떻게든 됐으니까 앞으로의 2년도 어떻게든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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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증후군이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 아직도 가끔 할일을 생각하면 숨이 턱턱 막히고 좀 힘들긴 하지만 최대한 에너지를 안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고 아예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건 아니고, '쉬는 시간'을 만들고 공부나 일 생각을 안하는 시간을 따로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응, 인생에도 여백의 미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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