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피스보트와 한국의 환경재단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피스 앤 그린보트'를 타고 왔다. 4년 만에 다시 하게 된 행사라 그런지 양측 대표, 스태프들도 굉장히 감격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1. 선내 기획프로그램
[틈틈이 선내에서 전시와 공연을 준비하던 사람들]
일본 측에서는 기획을 굉장히 열심히 준비한 것 같았다. 얼마 전 피스보트를 타고 세계일주를 다녀온 사람 중에서 배 안에서의 일을 돕기 위해 자원해서 탄 사람들도 많았고, 환경운동가, 원전 반대운동가, 예술인 등도 많은 자료를 가지고 탑승을 했다.
하지만 한국 측은 그러지 못했다. 환경재단이 어느 정도로 준비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로그램 기획에 있어서는 기대에 못미쳤다. 기후변동에 대한 강의, 어린이 선상학교, 사진가의 강연 등은 좋았으나, 그 외에는 이렇다할 좋은 프로그램이 없었다. 전체 프로그램의 절반 이상(거의 대부분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이 일본어로 진행되었고, 통역이 매우 부족해, 한국인들이 아예 참여하지 못하는 프로그램들도 많았다. 일본인 참가자들은 기존에 피스보트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피스보트 안에서는 참가자들이 직접 프로그램을 만들어 진행한다'는 의식이 있어서인지 매우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한국인 참가자들은 보통 백화점에서 하는 이벤트에 당첨되어 오거나, 환경단체나 지자체, 교육청 등에서 단체로 왔으며, 피스보트에 대한 지식이 별로 많지 않았다. 환경재단 홈페이지에서도 피스보트 내 프로그램 기획 등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으며, 참가자들이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공지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함께 부르는 노래]
나는 피스보트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고, 최대한 많은 것을 알아가겠다고 생각해서 굉장히 바쁘게 움직였지만 처음 이틀간은 굉장히 심심했다. 이번 피스앤그린보트의 주제는 사실상 '원자력이 없는 세상을 위한 선상 세미나'라고 봐도 좋을 듯 한데, 기획자도, 참가자도 대부분이 일본인이라 그들의 이야기만 듣고 있노라니 따분했다. 열심히 강연을 듣고 있노라니, 그 자리에 한국인이라고는 두세명밖에 없어서 "한국에서의 원자력발전에 대해 얘기해주세요"라는 질문도 간혹 받았으나, 나는 그 쪽 방면에 대한 지식도 관심도 없었던 상태라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같이 갔었던 한국 사람들은 그런 분위기가 너무 부담스러워서 그 다음부터는 원전 관련된 기획은 아예 참여하지 않기도 했다.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의 이야기를 듣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피스보트만의 큰 장점이었다. 내가 언제 어떻게, 히로시마 원폭투하 현장에 있었던 할아버지를 만나 그 때의 생생한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을까. 중학교 때 후쿠시마에서 "원자력과 함께하는 밝은 미래"라는 표어를 써서 상을 받았다던 사람이, 후쿠시마 원전사고 후 피난생활을 하며 "원전 반대"를 외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 후쿠시마 출신 화가가 기획하는 전시회 준비를 돕는 것,원전반대를 외치는 예술인들과 함께 콘서트를 기획하고, 같이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건 정말 값진 경험이었다. 특히 재일교포가 일본에서 받는 차별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 때, 옛날 식민지 조선에서 살았다던 할머니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미안하다고 말하는 광경은 언제 떠올려도 콧등이 시큰해지고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장면으로 앞으로도 계속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다음 피스앤그린보트에서는 환경재단이 유명인 초청에만 심혈을 기울일 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두루 섭외하고, 일반 참가자도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도록 미리 도우면 좋을 것 같다. 이번에 일본 피스보트 측에서는 "아시안 비트"라고 하는, 한일 청년 공동 퍼포먼스를 기획해왔다. 미리 노래가사와 춤을 다 만들어와서, 자기들끼리 우선 연습한 후, 한국인 참가자를 배 안에서 모집해 단기간에 연습시켜 함께 공연을 했다. 말은 잘 안통해도 비슷한 또래들이 만나 함께 노래하고 춤추면서 어울릴 수 있었던 건 분명히 좋았고, 함께 하나의 쇼를 해냈다는 데에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공동'이라는 말을 쓰기가 어색한 것은, 기획부터 연출까지 일본 쪽에서 다 했고, 한국인은 그냥 '참여'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미리 환경재단과 피스보트 스탭들이 준비를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았다.
2. 교류
배가 정말 컸다. 크루즈 중에서는 그리 큰 편이 아니라고 했지만, 어쨌든 3만5천톤급의 10층짜리 배였다. 참가자는 1000여명에 이르러,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보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8박 9일동안 한 배를 탔기는 했지만, 처음 며칠간은 한국인끼리, 일본인끼리,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젊은 사람들은 영어로라도 말을 걸어서 교류를 시도했지만, 5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면을 보기 힘들었다. 식사 후 혼자 책을 읽거나 신문을 읽거나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밥도 무리지어 먹으러 가는 경향이 있었다. 한국인 참가자들은 대부분 단체로 참가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같은 방을 썼던 룸메이트들과 마지막날 아침식사]
나흘째 되던 날이었나, 드디어 '선상 가족만들기'라는 프로그램이 등장해, 한국인과 일본인을 섞어서 선내 가족을 만들었다. 그 후 배 안의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 가족이 다함께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거나 하면서 서로 어울리는 모습이 보였다. 말이 안통하면 그림을 그려서라도, 지나가던 통역을 불러서라도 이야기하려고 하는 의욕들을 보였다. "엄마"랑 만나고 싶다면서 배 안을 돌아다니는 중학생 아이도 있었고, "자식들"이랑 내일도 아침을 먹고 싶다면서 통역을 부탁하는 아저씨도 있었다. 이 프로그램이 참가자들의 교류에 엄청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다음에는 아예 첫번째날이나 두번째날 하고, 참가희망자가 아닌 전원을 대상으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난 선내 가족이 없어서 심심했기 때문이지........)
3. 선내 서비스
파나마 국적의 배에 승무원 중에는 필리핀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피스보트가 빌려서 쓰고 있는 배라서, 배 안의 표기는 주로 일본어,영어,스페인어로 되어 있었다. 피스앤그린보트 행사를 위해 부분적으로 한국어를 급하게 적어놓은 것도 있었지만, 자판기나 기타 시설을 이용할 때 외국어를 모르면 어려울 만한 게 많았다.
방은 나쁘지 않았다. 승무원들이 방 청소를 매일 해주었고, 부탁하면 뭐든 친절하게 해주었다. 식사는 양식과 일본식으로 나왔는데, 한국인 참가자들의 가장 큰 불만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가장 힘들었던 게 뭐냐고 물으면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 중 첫번째가 멀미고 두번째가 식사였다. 가뜩이나 멀미 때문에 힘들고, 배 안의 특유의 냄새도 참기 힘들었는데, 식사하러 가면 우메보시 등의 냄새가; 된장이라고 주는 건 한국된장이 아니라 늘 왜된장이었으며, 장아찌도 모두 일본식이었다. 양식은 아침에는 늘 토스트,샐러드 등이 나왔고, 저녁에는 코스 요리가 나왔다. 문제는, 채식주의자는 참기 힘든 식단들이라는 거다. 나는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매 끼 고기가 나오는 건 좀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침에 나오는 양식은, 정 싫으면 빵만 주워먹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샐러드에도 고기가 들어있다니. 헐. 점심 저녁 모두 고기가 안 들어있는 메뉴가 없었다. 고기덮밥이 자주 나왔고, 야채수프마저 돼지고기를 잘게 썰은 게 들어있었다. 채식주의자를 몇 명 만났는데, 그들은 굉장히 곤란해하면서 밥과 된장국만 먹고 있었다. 그 중 한명은 환경을 생각하며 채식을 결심한 사람이었는데, 환경재단에서 하는 행사에서 이런 배려가 부족한 것이 참 아쉽다고 했다. 공감, 공감. 어쨌든 메뉴는 개선이 좀 필요한 것 같았다.
선내 서비스는 모두 엔화로 결제가 되었다. 그래서 배를 탈 때 신용카드 번호를 알려주거나, 신용카드가 없는 이들은 예치금으로 15,000엔을 내야했다. 내 명의의 신용카드가 없어서 나도 15,000엔을 예치금으로 두었다가 오늘 돌려받았는데, 엔화가 떨어지고 있는 이 마당에 이걸 또 환전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조금 아팠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이제 또 언제 일본에 갈지 모르니 이걸 환전을 하긴 해야할 거 같은데 귀찮기도 하고 엔화 가격이 떨어지고 있고... 선내 서비스 가격을 달러,원,엔 등으로 할 수는 없는걸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4. 기항지
기항지 투어프로그램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피스앤그린보트 기항지 투어는 미리 신청해야만 했고, 선내에서는 신청을 받지 않았다. 결국 난 아무 프로그램에도 참여하지 못했고, 자유여행을 즐겼다.
[첫번째 기항지, 오키나와 나하 : 슈리성]
[두번째 기항지, 츠루가 : 기차타고 교토에 가서 기요미즈데라 관광]
[세 번째 기항지, 후쿠오카 : 쇼핑하고 걸었다.]
그래서 투어프로그램에 다녀온 사람들에게 많이 물어보고 들었다. 대부분 그렇게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배멀미로 고생했는데 배에서 내리자마자 버스를 2~3시간씩 타고 어딘가로 가는 게 좋지만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여유롭게 볼 수 있는 게 아니고 시간에 맞춰 빨리빨리 다녀야해서 힘들었다고 했다. 패키지 여행프로그램이 공통적으로 지닌 단점일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혼자서라면 가격, 시간 등으로 가기 힘들었을 곳을 갈 수 있어서 좋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후쿠오카에 내렸을 때, 나는 나가사키에 갈까 하다가 기차 운임이 너무 비싸서 그만두었다. 2시간 걸리는 건 편도 4천엔이 넘고, 2천엔 정도 하는 건 다섯시간이나 걸린다니! >< 하지만 투어프로그램에 신청한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편안하게 나가사키에 잘 다녀왔으니 그게 조금 부러웠다. 또, 원전이나 미군 기지 등 좀처럼 가기 힘든 곳을 견학할 수 있고, 주민들고 교류할 수 있는 프로그램 등은 나름대로 특별한 경험이 되었을 것 같다.
5. 멀미
멀미........ 사흘동안은 괜찮았다. 바다가 매우 얌전했고, 날씨도 좋아서 일광욕을 즐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오키나와에서 출발한 후에 바다가 몹시 사나워졌다. 배가 흔들려서 배 안의 엘리베이터도 멈췄고, 밖으로 나가는 게 금지되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배라고 생각하지 말자... 놀이기구야...'라고 생각하며 멀미를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멀미 때문에 밥도 먹기 힘들어서 결국 멀미약을 먹었는데, 그게 참... 사람 재우는 약이더라. 같은 방을 썼던 애들은 그날 정말 하루종일잤다. 나도 하루종일 자고 싶었는데 연습할 것도 있었고 친구 도와주기로 한 것도 있어서, 갔다가 끝나면 방으로 달려와서 조금 눈을 붙였다가 또 나갔다가 하기를 반복했다.
기항지에 드디어 내렸을 땐 살 것 같았지만, 이제는 땅멀미가 찾아왔다. 걷고 있는데 땅이 너무 흔들려서 정말 지진이 난 줄 알았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았고, 나만 흔들리고 있는 거였다. 걷다가 앉아서 쉬다가 다시 걷다가... 멀미, 참 힘들었다.
이렇든 저렇든, 이번 피스앤그린보트를 타고 참 많은 걸 알게 되었고 내 신년계획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다녀온 사람들 중에 몇 명은, 재일교포들이 다니는 학교에 한국어책 보내기 운동을 계획하고 있고, 원전에 관련된 기사도 찍어서 카톡으로 서로 주고받을 만큼 관심이 생긴 모양이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친구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이 세상에 그냥 지나칠 일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민간교류가 꾸준히 이루어져야할 것 같다. 내년에는 더 좋은 기획으로 피스앤그린보트가 또 출항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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