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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2017

영어와 나.

by Bani B 2017. 4. 11.



   이번 주에 영어6을 드디어(ㅠㅠㅠㅠㅠ) 끝낼 예정이다. 그저께에도 영어 숙제가 너무 하기 싫어서 한숨을 백 번은 쉰 것 같다. 도대체 나는 언제부터 영어가 싫었는가. 영어와 나와의 이 기나긴 애증의 시간을 돌이켜보았다.


   주변 사람들 말로는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AFKN인지 뭔지 하는 라디오를 들으며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이상한 말을 했다고 한다. 그냥 그걸 내버려뒀으면 내가 영어를 좋아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러기엔 한국어로 읽을 거리가 많았으니.. 나한테 조기영어교육은 아무래도 무리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후에 영어를 접할 일이 없다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영어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해 학교에서 선생님이 영어 알파벳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때마침 집 근처에 영어학원이 생겼고, 몇몇 아이들은 벌써 그 학원에 다니면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친구가 같이 다니자고 해서 엄마한테 허락을 받아 한 달 수강하게 되었다.

   그 학원은, 나름 '회화' 학원이었고 아이들에게 계속 영어로 말을 걸어서 자연스럽게 깨우치게 하자는 방침이었던 것 같다. 처음 만난 선생님은 미국 사람이었는데, 내가 학원에 두 번째로 간 날, 뭐라 솰라솰라 하고 슬퍼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뭐라는 거야?" "몰라." 우리는 아무도 선생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몰랐고, 나중에 한국인 선생님이 들어와서 "오늘 재키 마지막 날이에요"라고 했을 때 그제서야 "아~ (이럴 땐 영어로 뭐라 해야하지) 바이바이~" 했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 목이 말라서 정수기에 가서 물을 떠 마시려고 했다. 종이컵을 빼는 순간 한국인 선생님이 와서 영어로 말을 걸었다. "저 물 마셔도 돼요?"라고 한국어로 물으니 영어로 답이 돌아왔다. 마셔도 되는 건지 아닌 건지 알 수가 없었다. "May I get some water please?" 라는 문장을 따라하라고 했다. 나는 알파벳을 읽을 줄도 몰랐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더더욱 몰랐으나 어쨌든 들리는 대로 '메이 아이...' 하면서 세 번 정도 말한 후에야 물을 마실 수 있었다. 왠지 눈물이 났다. 그리고 그 후로 학원에 가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원어민 선생님이 있기는 했으나, 말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고 내가 딱히 몇 마디 하지 않아도 수업은 매우 잘 굴러갔으므로 영어로 말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선생님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회화학원에 한 학기 다녀보기도 했는데, 그 선생님도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잘 알아들어주셨다. 영어듣기평가에 대비해 뭔가 듣기는 했는데, 영어 대화가 들리는 순간 머릿속이 딱딱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영어 듣기 문제는 늘, 몇 단어 주워 들은 걸로 알아서 이야기를 재구성해서 찍어서 맞추는 식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좋은 점수를 받아서 대학에 가기는 갔다. 사실 그 당시부터 지금의 남자친구와 영어로 펜팔을 하기는 했지만, 한 달에 한 두 번 메일을 보냈던 이유는 무엇을 뭐라고 써야할지 모르겠고 메일 하나 쓰면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지금 읽어보면 아주 엉망진창이다.) 1학년 필수교양으로 영어쓰기와 영어발표 수업을 들었다. 선생님은 매우 성격 좋은 뉴질랜드 사람이긴 했는데 역시나 내가 멍때리는 시간이 좀더 많았다. 쓰기 숙제는 할 만 했는데 발표수업이 정말 싫었다. 학교 안에 글로벌존이라고 하는, 각종 영어공부자료를 얻고 방송도 볼 수 있는 곳이 있어서 딱 한 번 갔었다. 방송을 한 번 볼까 싶어서 헤드폰을 빌리려고 했는데, 빌려주시는 분이 "영어로 말해보세요"라고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별 것 아닌 문장인데, "헤드폰 좀 빌려주세요"라는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옛날 물 한 컵 마시려고 '메이아이겟썸워터플리즈'를 말해야했던 날이 생각나기도 했다. "다음부터는 영어로 말씀하셔야 돼요"라는 말을 들으며 헤드폰을 받기는 했는데 앉아서도 땀이 났다. 


   대학 다닐 때 유럽 여행을 두 번 갔다. 첫 여행은 동생이랑 체코와 독일을 갔는데 사실 유럽여행이란 게... 가기 전에는 '영어 못하는데 어뜩해어뜩해' 하지만 막상 여행가면 영어 쓸일도 별로 없더라. 두 번째 여행은 덴마크와 스웨덴이었는데, 지금의 남자친구가 그 때 가이드를 해준 데다가 그 때는 일본어로 서로 얘기하던 시절이라 영어를 별로 말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이 아이와 사귀기 시작하면서였다. 첫 1~2년은 일본어로 이야기를 했다. 점점 화제가 많아지고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지면서, 남자친구가 못알아듣는 일본어가 많아졌다. 그렇게 우리의 일본어 속에 영어단어가 마구 섞이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내가 영어를 하게 되었다. 되게 신기했다. 


   여기까지만 쓰면 "영어와의 관계회복기" 쯤이 되겠다.


   영어랑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여행사에서 일하면서 외국에 전화거는 것도 어렵긴 해도 재밌다고 생각했다. 남자친구와는 매일 영어로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영어로 카톡하고 영어로 이야기하고... 내가 드디어 영어를 정복한 것인가! 하면서 기쁘기도 했다. 스웨덴으로 이사와서도 처음에 자신있게 영어로 사람들한테 말을 걸었다. 그랬는데...

   이놈의 영어수업을 들으면서 다시 자신감이 바닥! 다시 안좋은 기억들이 스멀스멀! ㅜㅜ 수업이 어려워서라기보다는, 내 실력은 그대로였는데 사람들이랑 의사소통이 좀 된다며 안주했던 게 문제였던 것 같다. 영어 5 시험보러 갔다가 듣기 못알아듣고 좌절해서 돌아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도 다행히 낙제는 면했다) 그저께도 마지막 과제를 하는데, 사실 줄거리 요약하고 분석하는 쉬운 과제였는데 그 텍스트를 읽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려서 좌절했더랬다. 


   내일 영어 6 시험도 그래서 그리 잘 볼거라는 생각은 안한다. 제발 통과만 하게 해달라고 빌고 있다. 영어랑 친해질 거라는 기대도 이제 버리기로 했다. 사람마다 잘 맞는 언어가 있고 영 아닌 언어가 있는 게 아닐까? 안타깝게도 영어와 나는 그냥 영원히 이런 관계일 것 같다. 교과서는 이제 보기도 싫으니 빨리 중고로 팔아버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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