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이 열렸던 날은, 내가 스웨덴으로 이사온 지 딱 2년이 되는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유튜브 생중계로 남북정상회담을 시청했다. 중간중간 아침밥도 먹고 씻기도 하고 했지만 TV를 끌 수가 없었다. 도보다리에서 산책을 하는 장면에서 '이게 정말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인가'하는 생각이 들었고, '한반도에 더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할 때는 콧등이 시큰해졌다. 김대중이 김정일을 만나고, 노무현이 김정일을 만날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남북한 지도자가 저렇게 인간적이고 소탈한 모습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생중계로 보게 되다니.
아니, 사실은 내가 스웨덴에서 2년을 살면서 느낀 것들을 정리해서 적으려 했는데, 남북정상회담의 여파로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생각해보니 작년에도, '벌써 1년'으로 시작되는 글을 쓰면서도 하필이면 선거철이었던 까닭에, 우리나라가 좀더 좋은 나라가 되었음 좋겠다는 따위의 글이나 쓰고 있었다. 오늘은 제목에 충실한 글을 써보자...
지난 2년동안 가장 많이 고민하고 힘들게 했던 것은 의외로 '인간관계'였다. 외국에 나가서 살면 흔히들 '음식은 입에 잘 맞아? 문화충격은 없고?' 같은 말을 많이 듣지만 사실 서른이 넘어가는 이 시점에 다시 '건강한 인간관계'는 어떻게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인지를 고민하고 배우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사실 최근 2년처럼 이렇게 갑자기 많은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대학에서는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긴 했지만, 과에서는 별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동아리라는 게, 결국엔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이니, 약간의 갈등이 가끔 생기긴 해도 그리 '우리가 엄청 다른 사람'이라는 걸 느낀 순간은 없었다. 회사에 들어가서 좀 다른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긴 했지만, 회사에서는 할 일과 할 말이 정해져있었고, 마음에 안드는 사람과는 되도록 말을 안하면 그만이었고, 입사동기를 제외하고는 그리 개인적인 친분을 쌓지도 않았다.
하지만 외국에 나오니, 우선 '여기서는 적극적인 사람이 되어야해. 인맥도 많이 쌓고, 친구는 많을 수록 좋다'는 압박감이 생겼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남자친구와 그의 가족밖에 없었던 이 땅에서 나도 친구가 많이 생기고 아는 사람이 많이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맨 처음 만난 SFI친구들부터 시작해서 한국사람들, 남자친구의 친구들의 여자친구들 등등... 성격이 워낙 외향적이고 남한테 말거는 걸 별로 무서워하지 않아서 웬만하면 서로 호감이 생기고 다음 만남으로 이어지고 이내 친구(또는 친구 비슷한 것)가 되었다. 모두가 서로에게 친절했다. 모두가 '네가 원하는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면 좋겠어'라고 말했고, 모두가 '우리 모두 행복하게 잘 살면 좋겠어' 라고 말했다. 만났던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지만, 그리고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지만, 그 와중에도 누군가와는 갈등도 생겼고 멀어진 사람들도 생겼다.
나는 모든 사람들과 다 잘 지내고 싶은데 왜 이런 일이 생길까. 다 내 잘못인 것 같고, 내가 새 친구 사귀는 게 서투른 걸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는 '원래 외국 나가서 한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거 아니랬어'라고도 했지만, 나와 주변인들의 문제를 '한국인의 문제'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멀어진 친구들이 한국인뿐만도 아니었고... 사실 원인은 단순했다. 같은 지역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 중에는 잘 맞는 사람도 있겠지만 잘 맞지 않는 사람들도 분명 있었던 것. 하지만 '가치관이나 관심사가 많이 다른 사람을 만나고, 별로 유쾌하지 않은 만남을 가진 후 그걸 인식하고, 자연스럽게 헤어지는 경험'을 한국에서 별로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람과 더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렇게 생각하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어떻게 할 줄 몰라 쩔쩔매던 게 문제였다.
그러면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생각보다 힘든 일이라고 느꼈다. '왜 저런 식으로 짜증나게 말을 하지?' '왜 저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지?' 라는 생각에서 상대방에 대한 편견과 오해와 미움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저런 말을 할까... 신기하네' '저런 행동을 할 수도 있구나...' 정도로 넘어갔다면, 나도 상대에 대한 유감이 그리 많지 않았을텐데. 그래서 사람 때문에 속상한 일이 생길 때 '그래... 모두가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말하지 않지' 하고,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넘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 쉽지는 않은 일이다. 역시 도는 아무나 닦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같은 지역에 살면서, 비슷한 처지에 있으면서, 자주 만나거나 연락을 하면 친밀감은 더 크게 느껴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랫동안 사귄 죽마고우도 아니고, 생각지 못한 말 한마디에서 오해가 생기고 관계가 깨질 수 있음을 늘 명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해외에 사는 사람들이 종종 '외국에서 한인커뮤니티에 끼면 안좋다'라는 말들을 하는 것은 이런 부분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적절한 간격이 있어야 모두 다 잘 자랄 수 있다고,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말씀하셨지. 친하다고 생각할수록 기본적인 것은 지키고, 실언으로 상처를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웨덴에 왔던 첫 해에는 만나는 모든 사람과 잘지내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이제 그런 마음이 좀 한풀 꺾였다고 해야할지. 고등학교 때에도 같은 반 모든 아이들과 잘지냈던 것도 아니고, 심지어 1년 지나도록 말 한마디 안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외국 나와서 '모두 다 친구로 지내야지'라는, 다짐을 하는 게 욕심인 것 같다. 역시 모든 답은 지피지기에 있었군. 내가 모자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약간의 실패에도 그리 충격받지 않게 될 것이고, 내가 그리 착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인정하면 남에게 속상한 마음을 품는 자신에게 실망할 일도 없을 것이다...라고 법륜 스님 블로그에서 본 것 같다. '외국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니, 나도 앞으로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하고 다짐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원래 나 자신을 바꾸는 게 제일 힘든 일이니, 그게 잘 되지 않는다고 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도 없어야할텐데... 지난 2년동안 나는 스스로를 좀 많이 괴롭혔던 것 같다. '생긴 대로 살자, 마음가는 대로 하자' 이것이 이제 나의 다짐.
'일상 > 2018' 카테고리의 다른 글
0517 근황 (9) | 2018.05.17 |
---|---|
CSN과의 싸움에서 지다. (0) | 2018.05.08 |
스웨덴 영주권과 CSN (6) | 2018.03.22 |
'니하오' 를 듣는 것에 대하여. (0) | 2018.03.21 |
2018년 설날 (2) | 2018.02.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