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2021

규동 - 소고기보다는 그 밑에 깔린 밥이 좋아

by Bani B 2021. 10. 7.

대학에 가면서 자연스럽게 집에서 나와 자취를 했고, 서울에서 약 8년간 살면서 이런 저런 음식을 해먹어보긴 했다. 처음에는 미역국도 레시피 보면서 하다가, 어느 순간 레시피 없이 미역국과 된장국 정도는 끓여내는 자신을 발견하고 신기해했던 게 생각난다. 요리하는 게 재밌다고 생각해 대학 다닐 땐 밥을 많이 해먹었는데, 뭐… 그렇다고 요리 실력이 그렇게 빨리 늘진 않았던 것 같다. 친구들 불러다놓고 김치볶음밥을 하려는데 김치도 안자르고 집어넣는 나를 향해 친구가 다급하게 소리친 적도 있으니.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가서도 밥은 정말 열심히 해먹었다. 제일 먼저 밥솥을 샀고, 마트에서 제일 싼 식재료가 뭔지 파악했다. 그렇게 나는 그 학기동안 낫토를 원없이 먹었다… 낫토가 그렇게 싸다면, 내가 하루빨리 낫토의 맛에 길들여지는 게 좋지 않을까,라며 며칠 꾸역꾸역 먹었더니 금세 낫토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낫토를 잔뜩 사서 아침으로도 먹고 점심 도시락으로도 싸갔는데, 일본 친구들이 ‘누가 낫토를 도시락으로 싸오냐’며 경악했다…. 그 후로 점심도시락은 무난하게 계란말이와 시금치나물이 되었던 것 같다.

아무리 요리하는 게 재밌어도, 용돈받는 학생 입장에서 식재료를 마구마구 살 수도 없고, 늘 할 수 있는 게 한정되어있었다. 졸업을 하고 직장인이 되면 돈도 버니까 좋은 식재료로 밥도 더 잘해먹고 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시간이 없어서 밥을 해먹을 수가 없었다. 처음 다녔던 곳은 칼퇴가 보장되었지만 지하철 두 번 갈아타며 한시간 조금 넘게 걸렸던 데라 집에 오면 너무 피곤했다. 그 다음에 다닌 곳은 저녁 8시 이전에 집에 가는 게 너무 감사할 정도로 야근이 많은 곳이어서, 저녁은 햄버거를 사먹거나… 그것도 야근식대 결재올리는 게 귀찮아서 그냥 참고 집에 가는 길에 떡볶이와 김말이로 때우기 일쑤였다. 그땐 정말 냉장고에 물이랑 아이스크림밖에 없었던 거 같은데? 그리고 보상심리가 작용해서, ‘일을 이렇게 열심히 하면 밥 좀 사먹어도 돼’라며 점심은 늘 사먹었고 주말에도 밥하기 귀찮아서 자주 사먹었다. 너무 많이 사먹어서, 식당에서 사먹는 찌개류도 질렸고 그리 맛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도, 간이 세고 달고 MSG 팍팍 친 음식을 먹으면 식당음식들 생각이 난다.

한식에 질려서 먹기 시작한 게 규동이었다. 결국에는 교환학생 때보다도 더 많이 먹었던 것 같다. 서울대입구역 근처에 있는 규동집에 자주 갔었는데 내가 감동했던 포인트는 맛보다도, 밥을 정성스럽게 퍼주는 모습이었다. 밥을 그렇게… 시간을 들여서 예쁘게 담는 식당을 그때까지 본 적이 없었다. 밥을 퍼서 담는 데만 1분이 걸리는 것 같았던 규동집. 마치 ‘규동은 사실 소고기가 아니라 이 밑에 깔리는 밥이 엄청 중요하답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밥이 담기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고 그런 밥을 먹으면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우울할 때마다 그 집에 가서 밥을 먹곤 했다.

*
요즘 나는 가을을 타는 것 같다. 기분도 별로 안좋고 늘 뭔가 가슴에 얹혀있는 느낌이고 사람 만나는 것도 썩 내키지 않고 마냥 피곤하다. 피곤하다보니 음식도 잘 안하게 되고, 하더라도 빠르고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걸로 때우고 있는데 며칠전에 집사람이 규동을 해줬다. 현지인의 레시피로 해서 맛도 현지 맛이 났지만 밥을 열심히 예쁘게 퍼담는 모습에 그 규동집 생각이 나서 마음이 더 훈훈해졌던 것 같다. 밥을 시간을 들여 예쁘게 담아주던 집. 어쩌면 정말로, 소고기보다 중요한 건 밥인 걸지도 모르겠다.

한국인은 밥심이지…라고 하기엔 주제에서 좀 벗어났나? 밥 잘챙겨먹어야지.

반응형

'일상 > 2021'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외에서 가족관계증명서 등 서류 뽑기 (feat. 공동인증서 대환장...)  (0) 2021.12.29
스웨덴에서 시청 결혼식  (0) 2021.12.16
9월말  (0) 2021.09.30
심심한 일상  (0) 2021.09.19
4학년, 개강  (0) 2021.09.0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