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첫 글을 2월에 쓰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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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친구 집에서 맞고 집에 오자마자 시험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고 그러고 바로 새 학기 시작하고 이제 3주째인건가. 세 과목을 동시에 들으니 왠지 정신이 없다. 그래도 한 과목은 대충 아는 내용이라 설렁설렁 하고 있지만 나머지 두 개는 과제를 하면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인공지능을 공부하면서 맨날 재미없는 확률 문제를 풀다가 드디어 알파고...발끝에도 못따라가지만 간단한 게임을 하는 봇을 만들었는데, 이 과제는 교수님이 만든 봇과 대결해서 스무 번 연속 이겨야 과제 통과다. 물론 교수님은 우리 수준을 배려해서 아주 살살 만드셨지. 설거지하다가 갑자기 그럴듯한 아이디어가 떠올라 '그래, 요렇게 하면 무조건 이기겠지'하면서 신나게 코드를 썼는데 왜 꼭 19번째에서 지는 것인가. 테스트할 때마다 '제발! 한번만 더 이겨줘! 제발!'이라고 외치지만 어김없이 지고야 마는 나의 멍청한 AI.
야심있는 학생이라면 어떻게든 더 똑똑한 놈을 만들겠다고 밤을 샐지 모르나, 나는 그렇게 야심가도 아니고 AI를 공부하면서 점점 더 인공지능 개발에 회의를 느끼며 인간이 소외되는 세상을 상상하는 문과였던 것이다. '인간이 여가시간 즐기려고 만든 게임을 왜 굳이 AI를 써서 한계에 도전해보고 싶은건가'하는 의구심이 들고, 정확도 높이려고 안간힘을 쓸 때마다 '뭐 얼마나 더 잘살겠다고... 이렇게 하면 정말 인간이 더 행복해지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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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중에 또다시 섬머잡 채용시즌이 돌아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다듬고 슬슬 보내고 있다. 작년에는 지인에게 부탁해 자소서를 다듬었는데 올해는 노동조합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를 받아보았다. 입학했을 때 Sveriges ingenjörer(스웨덴 엔지니어들)이라는 직관적인 이름의 조합에 가입했는데, 학생은 연회비가 엄청 싸서 가입할만 하다. 유료 기술정보지를 무료로 볼 수 있고(과제할 때 유용했음) 이력서나 계약서 같은 걸 봐주기도 하고 이런저런 세미나도 있는 것 같다. 뭔가 강의 들을 수 있는 쿠폰도 메일로 왔는데 아직 써보지는 않았고... 작년 섬머잡 했을 때 월급이 생각했던 거랑 차이가 많이 났는데, 회사에 물어보기 전에 조합에 먼저 문의하고 상담받은 게 좋았다.
여튼 이번에는 이력서랑 자소서를 보내서 봐달라고 부탁했는데... 아니 세상에. 나는 한장짜리 이력서와 한장짜리 자소서를 보냈는데 피드백이 A4로 여덟 장.... 그것도 복붙한 피드백이 아니라 정말 내 링크드인도 읽어보고 쓰신 것 같은, '이런 부분을 어필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이 부분은 담당자에게 이런 인상을 줄 수 있으니 안 쓰는게 좋을 것 같아요' 등 나한테 꼭 맞는 피드백이었다. 조합 가입할까말까 고민하는 대학생이라면 이런 서비스는 정말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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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점을 미리 좀 채워놓은 덕택에 두 달, 잘하면 세 달까지도 학교 안가도 될 거 같아서, 가을에 집사람과 한국에 가서 두세 달 있으려고 준비하는데 은근히 생각할 게 많다. 집사람은 휴직을 하고 어학원 가서 한국어를 배우려고 하는데, 무슨 어학당 입학서류가 이렇게 많고 까다로운가... 도대체 최종학교 성적표는 왜 보자고 하는지 이해할수가 없다. 한국어 어학당에서... 간호대 성적표를 보시면... 뭘 알 수 있나요...? 라고 묻고 싶었다. 제출 서류 중에 부모님 재정증명서도 있길래 '우리가 서른이 넘은 성인인데요...' 했더니 그건 안내도 된다고 했고, 어떤 학교는 부모님 신분증 사본을 요구하기도 했다. 아니 도대체 왜! 그걸로 뭐 하려고!
그래도 그... 가을에 가는 거만 생각하면서 버티고 있다. 한국을 1년 넘게 안간 건 처음이라 이제 좀 힘들다. 설날이 특히 그랬다. 뭐 우리집은 이제는 친척들 다 모이고 그렇지는 않고 부모님과 동생만 소소하게 저녁먹고 넘어가지만은, 그래도 그 떡국먹는 사진을 보면서 왠지 좀 울컥했다. 친하지는 않지만 미국으로 이민간지 오래 된 사촌언니한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는데, 언니도 그런 기분에 연락을 한걸까. 다음에 만나면, 외국에서 십년 넘게 살면 이런 기분에 익숙해지냐고 물어봐야겠다. 근데... 이 기분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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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지. 지난 주부터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열살 때 수영을 배우다가 수영복을 실수로 앞뒤 바꿔입고 애들한테 엄청 놀림당한 이후로 발길을 끊었었다. 그래도 물에 뜨고 헤엄치는 건 할 수 있어서 (고개가 물 속에 있다면 얘기지...) 수경만 있다면 그래도 물 속 보면서 헤엄은 칠 수 있다. 그래서 하와이에 가서 오리발의 도움을 받아 바닷속 산호도 보고 물고기도 봤었다.
...라고 말하면 집사람은 코웃음을 치며 절대 믿지 않는다. (진짜거든?!)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수영을 할 수 있어야 그게 진짜 수영이지, 발 닿는 곳에서 헤엄치는 게 뭐가 수영이냐고 한다. 그리고 난 물 속에서 눈을 못뜬다. 그래서 수경 없으면 망함... 물 속에서 눈을 어떻게 떠요 여러분? 게다가 고개를 물 밖으로 내밀고 수영을 못하면 그건 수영을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 그래서 나는 스웨덴에서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이번에 제대로 배워보고자 4개월동안 진행되는 수영코스에 등록했다. 수강신청이 진짜 힘들었다. 봄가을에만 새 멤버를 받는데, 인원이 적어서 몇초만에 마감된다. 그걸 모르고 예전에 몇 분 지나 접속했다가 대기리스트에도 이름을 못올렸지... 그렇게 몇년 실패하고 드디어 광클릭해서 얻어낸 내 소중한 한 자리.
지난 주에는 음파음파 숨쉬는 거랑 물속에서 숨 내뱉기, 물에 뜨는 거 해보고 이번 주에는 약간 손발을 움직이면서 끝에서 끝까지 (그래봤자 10미터) 가는 걸 했는데 정말 재밌었다! 수강인원이 일곱명밖에 안되고 선생님은 지난 주엔 세 명이 와서(!!!) 거의 개인과외 수준으로 배웠다. 그동안 일주일 중 딱히 기대되는 요일 같은 게 없었는데, (학생은 주말에도 과제를 하니 주말이 없...), 지금은 벌써부터 다음 주 화요일 저녁 8시가 너무너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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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일 아침에 학교가야되지....... 요즘 이렇게 정신을 놓고 산다. 다들 온라인 강의하고 있는 마당에 왜 이 선생님은 꿋꿋하게 학교에서 백명넘는 수강생들과 수업을 하고 싶으실까? 이 선생님은 내가 스웨덴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말이 빠른 사람인데, 잠시 정신 놓으면 몇문장 놓치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한 챕터가 날아가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 그저께 선생님이 감기걸리셨다고 강의 녹화해서 올리는 걸로 대체했는데, 녹화할 때는 어쩜 말씀을 그렇게 천천히, 발음을 또박또박 하시는지... 제발 앞으로도 강의 녹화해주시면 좋겠는데...
내일 수업 정신차리고 들어야 하니 이제 자야겠다. '그해우리는' 새 에피소드 올라온거 보려고 했는데ㅠㅠ (한국에선 종영했다지만 넷플릭스에는 아주 찔끔찔끔 올라온다 에잇) 웅이랑 연수가 꽁냥꽁냥 하는걸 보는게 내 요즘 몇 안되는 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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