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때문에 이번 삼일절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삼일절이나 6.25전쟁 기념일에 '만약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던가,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따위의 생각은 아마도 나만 했던 건 아닐 것이다. 연평해전이라던가 천안함 사건이라던가 북한이 핵실험을 한다거나 미사일을 쏜다거나 할 때도, '에이 그래도 전쟁은 안 날거야'하면서도 '정말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정말로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났다. '설마 그렇게 금방 전쟁이 나겠어'했는데 정말 하루아침에 러시아가 쳐들어갔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예상했을까. 유튜버 Bald and bankrupt가 전쟁 일어나기 하루 전날 우크라이나에서 사람들을 인터뷰한 영상을 봤는데, 다들 '우크라이나는 괜찮습니다! 여긴 평화로워요!'라고 하는 걸 보니 그게 그렇게 남의 일같지 않았다. 옛날에 조선사람들은 생각이나 했었을까, 35년동안이나 그렇게 일본 통치 아래서 힘들게 살게 되리라고. 광복 후 사람들은 생각이나 했었을까. 소련이랑 미국이 신탁통치 어쩌고 할 때도 상상이 됐을까, 앞으로 그냥 그렇게 쭉 남북으로 갈라져서 남북으로 왕래도 못하게 살게 될 거라고? 심지어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서 3년동안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될 거라고 예상은 했을까?
러시아가 지금 고전하고 있는 이유로 전세계 군사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군대를 너무 만만하게 봤고, 미국이나 유럽 나라들이 강건너 불구경이나 할거라고 생각했고, 친러 성향의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나라 버리고 금세 다 도망갈 거라 오판했기 때문'으로 꼽는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푸틴이 생각했던 것보다 '자주 국가'에 대한 열망이 컸고 지난 닷새동안 정말 치열하게 버티고 싸웠다. 우리가 직접, 그 옛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광경을 볼 수는 없었지만,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서 그 모습이 보인다. 꼭 이겨서 우리가 이렇게 삼일절과 광복절을 기념하듯, 그들도 매년 승전일을 기념하게 되길 바란다.
*
주말에 스톡홀름에 가서 투표를 했다. 코펜하겐에서 하면 더 가까운데 혼인신고 때문에 스웨덴 대사관에 가야했다. 과제가 쌓여서 기차 안에서도 친구 집에서도 계속 과제를 해야했지만ㅠㅠ 그래도 날씨가 좋아서 나들이 가는 느낌으로 대사관에 갔는데, 들어가자마자 체온을 재고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를 하며 기다리다가 투표소에 들어갔다. 스웨덴은 코로나 끝났다고들 하는데 여긴 한국이네... 그리고 다들 왤케 친절하시지? 모르는 사람들인데 눈만 마주치면 다들 꾸벅 숙이면서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해주셨다. 잠시나마 한국에 다녀온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투표를 안하겠다는 친구와 한참 실랑이를 하고 나서, 자기 전에 '투표하기 싫다는 사람에게 투표를 하라고 할 권리가 내게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봤다. 물론 그런 권리 따위는 내게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직접 가서 무효표를 던지는 것과 별 이유없이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은 매우 다른 것 같다. 사정상 투표할 시간이 없다거나 못가는 상황이 아닌데 ‘그냥’ 안한다는 것에서 화가 났던 것 같다. 물론 모두가 뉴스를 꼼꼼하게 챙겨볼 수는 없고, 우리나라 언론이 공약을 중심으로 보도하지 않고 가십거리 위주로 보도를 하니, 공약을 빠삭하게 알고 꼼꼼히 비교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굴 뽑을지 모르니까 투표를 안하겠다'는 말은, '내 삶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정치가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알면서도, '정치인들은 다 똑같으니까'라는 핑계로 '조금이라도' 더 알려고 하지 않는 건 자신에게도 사회에게도 무책임한 일이 아닐까. 평소에 뉴스 안보다가 선거 때만 부랴부랴 벼락치기(?)를 하는 건 어차피 다 똑같다. 그렇게라도 해서 투표를 해야, 다시는 독재자나 라스푸틴 같은 자들이 설치지 않게 되지 않겠나. 다 나를 위한 일이다. ...라고 다음 날 아침에 또 설득을 하니 다행히 친구가 고맙게도 받아들이고 투표를 했다.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과연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
*
혼인신고한 얘기를 조금 써보겠다. 영사업무 예약을 이메일로 했고, 대사관에서 친절하게 서류 목록을 알려주셨다. 스웨덴에서 결혼을 하고 나서 한국 대사관에서 신고를 할 경우 준비해야할 서류는 다음과 같다.
- 대사관 홈피에서 다운받아 혼인신고서 작성
(부모님 이름에 스웨덴쪽 부모님 이름이랑 스웨덴 주민번호도 적고, 증인란도 채워가기)
- 스웨덴 personbevis를 영문으로, 도장까지 찍힌 버전으로 받아 준비하기 (skatteverket홈피에서 쉽게 신청가능)
- 그리고 그 personbevis를 한국어로 번역. (내가 번역함)
- 결혼할 때 받았던 vigselbevis 한국어로 번역(역시 스스로 번역해도 됨). vigselbevis는 대사관에 원본 들고 가야함 (복사하고 돌려주심)
- 본인 기본증명서, 혼인관계증명서, 가족관계증명서 - 공동인증서가 있다면 인터넷에서 발급 가능함
- 본인과 배우자 여권사본
*
그리고 나를 가장 열받게 만들었던 부분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아이한테 엄마 성 줄 수 있는 거잖아?'라고 알고 있다. 맞다. 아이한테 아빠 성을 줄수도 있고 엄마 성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의외로 (심지어 기혼자조차!) 많은 사람들이 '그걸 결혼하기 전에 이미 협의해서 정해야한다'는 걸 모른다.
혼인신고서에는 '자식에게 모의 성을 줄 것을 협의했습니까? 예/아니오' 라는 항목이 있다. 맞다. 우리나라 민법에 의하면,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른다.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모의 성을 따른다'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바꿔 말하면, '기본값'은 정해져있는데, 그걸 바꾸고 싶으면 바꿔도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두 옵션중에 고를 수 있다'라는 말과는 아주 다르다. 그렇다면, 자식이 '부의 성'을 따르는 것을 디폴트로 해야할 이유가 있을까? 호적이 있었을 때는 이게 중요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호주제도 없고, 본적도 없어지고, 기본관계증명서를 떼면 부모님 이름이 동등하게 나열되어 나오고, 세대주도 원하면 어머니로 변경할 수도 있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 굳이, 아버지 성을 기본으로 두어야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선택을 하게 해주면 안될까?
이 법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두번째 이유는, '자식에게 줄 성을 정할 시기'가 '출생신고시'가 아니라 '결혼신고시'이기 때문이다. 굳이 이걸 결혼 전에 합의해서 혼인신고시에 못박아야할 필요가 있을까? 혼인신고시에 '아버지 성 물려주기로 했음'이라고 했다가, 아이 낳고 나서 '엄마 성을 주고 싶다'면 절차가 매우 복잡해져서 이혼 후 재혼을 고려할 상황까지 온다고 한다. 왜,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드는 제도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아직 아이 생각은 없지만, 아이를 낳으면 스웨덴과 한국에서 둘 다 내 성만 붙이기로 오래전부터 이야기를 했었다...라고 말하면 꼭 내가 남편을 협박해서 쟁취한 것처럼 들리겠지만 사실 이건 남편의 아이디어다. 그의 생각에도, 내 생각에도, 그의 성보다는 내 성이 발음하기도 쉽고 전세계 어디서나 괜찮게 들릴 것 같아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어떤 사람들은 아버지 성을 따르기로 하고, 어떤 사람들은 부모 성을 둘다 따서 쓰기로 하는 등 세상에는 정말 이름짓는 방법이 다양하게 있는데, 한국의 민법은 왜 '세상이 다양해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여튼 그런 이유로... 대사관에서는 정말 우리가 '엄마 성을 따르기로 협의한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했고, 집사람이 일 때문에 스톡홀름에 오지 못했어서 전화로 확인을 했다. 내가 들었던 생각은.... 내가 만약 거기다가 표시를 안했으면, 집사람에게 전화를 굳이 해서 이 부분을 확인했을까? 아닐 것이다. 왜냐면 아버지의 성이 '디폴트'니까. 왜 이런 문제에 디폴트가 필요한 것인가, 애초에 그냥 '선택'이 가능했으면 이런 절차가 없었을텐데? 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추가협의'가 필요한 건가 생각하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덧붙이자면, 이건 대사관에 대한 불평이 아니고 우리나라의 불합리한 제도에 대한 불평이다. 오히려 대사관에서는 내 서류를 빨리 잘 처리해주려고 노력하셨음.
'아직 한국은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없어서 그렇잖아'라는 말도 일리는 있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법이 아직도 구시대적이니까 다양하게 살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닐까. 나는 그냥, 친구가 아이 낳는다고 할 때 '아이 이름은 정했어?'하는 질문과 함께 '아이 성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하는 질문도 좀더 보편화되면 좋겠다. 이런 작은 것들이 바뀐다고 내 삶의 질이 확 올라가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법들이 우리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을 제한하는 것은 맞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법들을 하나하나 바꿔나갈 때 비로소 다양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 차별받지 않는 사회가 될 것인데 언제까지 사회적합의 운운하니 이 정치인들아, 법부터 제정해야지! (혼인신고서로 시작했다가 차별금지법으로 끝나는 글이 되었다...)
'일상 > 20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4월의 거짓말 (0) | 2022.04.08 |
---|---|
스웨덴어에 있었으면 하는 한국어 표현들 (0) | 2022.04.05 |
3월의 마른 모래 (0) | 2022.03.13 |
2월의 플레이리스트 (0) | 2022.03.02 |
2022년 첫 글 (0) | 2022.02.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