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27일에 스웨덴으로 이사를 왔고, 올해 4월 27일에는 인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원래는 가을에 집사람과 갈 계획을 세웠고 이번 봄에는 갈 계획이 없었다. 당장 다음 주에 친구들과 하이킹을 갈 예정이었고 다음 달에도 주말마다 온갖 약속을 잡아놨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걸 다 취소하고 갑자기 한국에 가야할 일이 생겼다.
가족이 아픈 일을 블로그에 쓸지말지 고민을 조금 했다. 그렇게 좋은 일도 아닌데 괜히 동네방네 소문내기 싫으니까. 하지만 스웨덴에서 6년을 보내고 7년차를 맞이하는 소감을 제대로 기록하기 위해서 아무래도 상황을 조금은 설명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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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스웨덴으로 이민오면서 가장 걱정했던 것은 부모님의 건강과, 혹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동생이 짊어질 부담이었다. 부모님은 60대 초반이라 연세가 엄청 많은 건 아니어도 어딘가 아프다는 게 이상하지는 않을 나이다. 특히 아버지는 담배를 손에서 놓지 않는 사람이라 더 걱정이 되었다. 나는 원래 걱정을 사서 하는 편인데, 뜻밖의 소식을 갑자기 접하면 충격을 많이 받으므로 미리 모든 시나리오를 생각해놓고 나중에 어떤 소식을 듣게 되더라도 충격을 덜 받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스웨덴에 오고 나서 한동안은 악몽도 많이 꾸고 별 쓸데없는 걱정도 많이 하고 그랬다. 지금도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가족들이 카톡을 보내거나 전화를 했는지’를 확인하고 별 내용이 없으면 안도한다. 내가 자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구나, 그런 생각을 지난 6년간 매일 하며 아침을 맞았다.
아빠는 약 10년 전에도 목 수술을 받았는데 그땐 내가 일본에 있었다. 암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수술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하필 이럴 때 한국에 있지 않은 나 자신’을 원망하며 속상해했다. 수술 후에 변한 아빠 목소리가 조금은 어색했지만 그래도 수술이 잘 되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아빠가 담배를 피우지 않기를 바랐건만… 담배를 끊는다는 건 그렇게 힘든 일인가보다.
몇 달 전부터 아빠 목소리는 이미 좀 심각한 수준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지난 달에는 도저히 못 들을 정도였다. 제발 병원에 가라고, 병원 가기 전까지는 전화 안할 거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한 후에 드디어 지지난 주에 병원에 가신 모양이고, 그리고 큰 병원에 가고, 바로 수술 날짜가 잡혀 수술을 받았고, 암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 전날, 나는 잠을 청하면서도 또 오만가지 생각을 했고, 자고 일어나서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수술결과를 물었다. 암의 종류와 단계는 이미 그 전날에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다르지 않아 그리 놀라지는 않았고 오히려 헛웃음마저 나왔다. 와, 진짜네. 이런 일이 정말 일어났네. 그렇게 덤덤히 얘기하다 전화를 끊고, 동생과도 애써 덤덤하게 얘기하다 전화를 끊고, 집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하고 난 후에야 펑펑 울었다. 내가 제일 걱정하던 일이 불과 6년만에 일어났어, 이제 어떡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당장 가족 옆에 있고 싶었다. 멀리서 전화로 이야길 주고받는 것보다도, 이제부터 시작된 암과의 싸움에 동참하고 싶었다. 이미 아빠 목소리는 안나오겠지만 그래도 다음 수술 전에 한번 더 보고 싶었고, 옆에 있고 싶었다. 막상 전화할 땐 별로 티를 안 내도, 전화를 끊고난 후 나처럼 많이 울었을 엄마와 동생도 너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비행기표를 바로 샀고, 과제들을 지난 1주일동안 최대한 몰아서 했고, 새벽 네시에 기차를 타고 공항에 가야하니까 지금은 기차역 바로 앞에 사는 시부모님댁에서 과제를 하며 밤을 새려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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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스웨덴에서의 6년.
정착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한다. 얼마 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 집에서 이렇게 오래 산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도 세 군데나 다녔고, 중학교 때도 이사를 한번 했다. 중2때 이사한 집에 아직도 부모님이 살긴 하지만, 대학에 가면서 자취를 시작했으니까 그 집에 온전히 살았던 건 5-6년 정도다. 자취할 때도 2-3년에 한번씩 방을 옮겨다녔으니... 내가 인생에서 가장 오래 산 집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이다. 집뿐만이 아니다. 이곳저곳 이사를 하다가 천안에서 8년을 살고 서울로 올라가서 또 8년을 살았다. 그러다가 지금 룬드에서 6년을 살았는데, 2년 더 있으면 천안이나 서울에 살았던 기간과 같아진다.
여기서 사는 건 참 편하다. 조용하고, 생활비도 (서울에서 살던 때에 비하면) 그리 많이 들지 않고, 같이 사는 사람도 있어서 정서적으로도 안정되어있는 상태다. 이 도시를 떠날 계획이 아예 없어서 내가 사는 곳에 정을 듬뿍 줄 수 있는 점이 참 좋다. 어릴 때 이사를 많이 다녀서 그런지 늘 '정착'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고, 서울에 살 때도 마음 한켠에 '여기서 정착하고 싶지는 않은데 지방 가면 일자리가 없네' 따위의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이렇게 꽤 마음에 드는 도시에 정착해가고 있는 것 같아서 그게 제일 좋다. 아마 내가 지금 갑자기 한국에 가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나는 스웨덴살이 6년을 기념하며 '보금자리'에 대한 긍정적인 글을 썼을 것 같다.
하지만 정착이라는 것은,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이제 점점 움직이기 더 힘들어진다는 게 아닌가. 사실 이번에는 비행기표를 끊기가 참 쉬웠다. 다행히 지금 나는 학생이고, 심지어 수업도 하나만 듣는데다가 교수님이 인터넷에 수업자료를 다 올려주고있고, 온라인으로 과제를 내기만 하면 되어서 한국행을 정하는 게 쉬웠다. 이번 가을에 한국에 오래 있을 예정인데 그 역시 내가 그 기간에 굳이 스웨덴에 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나는 내년에 졸업을 할 거고, 별 이변이 없으면 그동안 그렇게 바랐던 정규직 풀타임잡을 드디어 잡아 일을 시작하게 될 건데, 이렇게 갑자기 한국에 일이 생기면 내가 열일 제쳐놓고 바로 갈 수 있을까. 아이가 생기면 또 어떨까. 당장 엄마 손이 필요한 아이들을 떼어놓고 한국에 오래 가있는 게 그리 쉬운일이 아닐 것이다.
지금의 나조차도... 마음 같아서는 아빠가 다 나을 때까지 옆에 오래오래 있다 오고싶지만, 6-8월에는 아무래도 스웨덴에 있으려고 한다. 섬머잡을 포기하고 한국에 있기엔, 어쨌든 나는 여기서 나중에 취업을 해야하고 이 섬머잡이 취업에 엄청 중요한 경험이니 포기하기가 어렵다. 내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라면 모를까, 여기에 뿌리를 내려가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한국에 오래 있는 것도 참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대해 죄책감이 든다.
떠나오면 다시 돌아가는 게 힘들게 될거라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이번처럼 '정착'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제대로 느낀 적이 있었나 싶다. 집사람은 종종 '우리가 나중에 나이가 들면, 1년의 반은 한국에서, 나머지 반은 스웨덴에서 보내자'고 이야기 하지만, 그 말에 나는 '과연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한다. 당장 우리 부모님만 해도 고향은 경상도지만, 충청도에서 30년 넘게 산 부모님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사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정착은 그런 모습인 거 같다.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내려서, 그 흙을 내려놓지 못하고 꾹 움켜쥐는 그런 것. 그래서 그리움을 담은 홀씨만 사방으로 엄청 날릴 뿐, 정작 자신은 아무데도 못가는 그런 민들레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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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병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하고 있다. 그동안 병원 쪽은 쳐다도 안보던 아빠가 어쨌든 병원에 갔고, 수술도 한번 받았고, 그쪽에서는 꽤 유명하다는 의사선생님을 만났고 다음 치료계획도 세웠다고 하니 이제 치료하고 나을 일만 남지 않았을까. 담배 끊으시라고 슈퍼에 가서 스누스를 몇 개 사보았다. 몇년 전에 아빠가 이걸 입에 넣자마자 바로 뱉었던 적이 있어서 과연 이번엔 어떨까 싶지만...
한국은 여름날씨라고 하니 기대가 된다. 정작 여기는... 이따 새벽 4시에 나가야하는데 영상 2도일 예정이다. 겨울옷을 입고 나가서 공항에서 갈아입어야할까. 어쨌든, 가서 한달동안 가족들과 잘 지내다 오겠다. 우리가족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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