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으로 이사온 지 딱 1년이 되었다.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떠난다고 했을 때 반응은 거의 비슷했다. 아쉽긴 하지만 여튼 잘 살아라, 가족과 친구들이 그립겠지만 그래도 종종 안부 전해라 등등. 그리고 빠지지 않는 말들이 있었다. "그래도 스웨덴이 더 살기 좋겠지?"
솔직히 인정한다. 만약 다른 나라였다면 이민을 갈지말지 좀더 고민했을텐데 스웨덴이었으니까 그 고민의 시간이 좀더 짧았던 거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만 29세 미만 저소득자에게 주거비를 월 1000크로나 넘게 지원해주고, 교육을 무상으로 지원해주는 이 나라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초기 정착비를 더 모으느라 아직도 한국에 있었을 것이다. 영주권을 받으면 스웨덴 사람과 마찬가지로 약 3000크로나씩 매달 교육보조금을 주는 나라니까 안심하고 남자친구를 따라 왔던 것, 인정한다.
하지만 1년동안 알게 된 것은, 물론 스웨덴이 '굶어죽는 일은 없도록' 복지제도가 잘 되어 있긴 하지만 이들 역시 이런 제도를 갖춘 게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노동의 대가가 우리나라보다 낫고, 일과 가정에 둘 다 소홀하지 않도록, 그리고 일과 함께 여가도 잘 즐길 수 있도록 휴식이 보장되는 시스템, 잘 갖춰진 연금제도 등.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특히 연세가 좀 많으신 분들이 종종 말씀하신다. "스웨덴도 옛날부터 이러지는 않았어." 남자와 여자가 성역할에 얽매이지 않고 가사노동과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스웨덴에서도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1900년대 초까지도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가 제한되어 있었고, 참정권도 없었고, 임금은 남성의 절반 수준이었다고 한다. 특히 여성이 결혼을 하게 되면 모든 결정권을 남편에게 넘기게 되었기 때문에, 몇몇 여성들은 일부러 결혼을 하지 않고 여성의 참정권이나 동일임금 등을 위해 싸웠다는 다큐멘터리도 본 적이 있다. (링크: Kvinnorna på fröken Frimans tid)
나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바뀌었으면 좋겠다. 불과 약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나라도 남자가 돈을 벌고 여자가 집안일을 한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1960년대 들어서 노동력이 많이 필요해지고, 남성의 노동력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어 1970년대에야 직업활동과 가사노동, 남녀평등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시작되었는데, 여성이 육아나 가족을 돌보지 않고 직업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그 때 보육원과 양로원을 많이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여성이 노동조건에 있어 차별을 받지 않도록 하는 법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출처 링크) 써놓고 보니 정말로 최근의 일이다. 우리나라도 지금, 딱히 여자라고 해서 집에만 있는 게 아니라, 바깥에서 일을 하지 않는가. 유치원 부족하다가 모든 정치인들이 말하지 않는가. 육아휴직을 어떻게 하겠다고 공약으로 막 내세우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걸 정말로 잘 바꿀 수 있는 사람을 골라 투표하면 금세 바뀌지는 않겠지만 우리나라도 조만간 스웨덴처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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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어학원에서 한국어 수업을 끝내고 수강생들이랑 맥주를 마시러 갔다. 7명 중에 두 명은 동성커플이다. 또 다른 한 명도 여자친구가 있는 '여성'이다. 그러니까 7명 중에 세 명이 성소수자이다.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만큼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다들 관심이 많은데, 펍에 들어가 맥주를 시키고 나자마자 한 분이 말씀하셨다. "한국 대통령 후보들이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얘기를 들었어. 기습시위를 한 성소수자들은 정말로 경찰에 잡혀간거야?"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정말로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한국에서 입양되어 오신 분들이 절반이라서 임신,육아와 관련된 부분에도 관심이 많으셨다. 한국에서는 정말로 낙태가 금지되어 있느냐, 미혼모는 아이 출생신고를 어떻게 하게 되어 있느냐, 옛날처럼 어른들이 여자아이를 좋아하지 않아서 입양을 보내는 것이냐, 혼혈이면 차별받는다던데 정말이냐, 한국에서 차별받지 않는 집단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냐, 군대에서 동성애자가 처벌되는 거라면 애초에 동성애자를 군대에서 안 받으면 되지 않느냐, 한국에서 기독교의 힘이 도대체 어느 정도냐 등등.
나는 이 분들에게 한국이 좋은 나라라고 얘기하고 싶다. 농담반진담반으로 사람들에게 "한국 그래도 (돈있고 남자로 태어났다면) 살만한 나라이지 않아요?"라고 얘기하지만은. 이 분들에게 마냥 한국 자랑을 하기에는 걸리는 것이 너무나 많다. "서울에서 반 년 살기로 해서 집을 구해야 하는데, 집주인에게 우리가 동성애자라고 알리는 게 좋을까 아니면 그냥 친구라고 하는 게 좋을까"라는 질문에 곧바로 "별로 상관없어, 솔직하게 말해도 돼"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우리 애가 스웨덴 사람이긴 하지만, 내가 한국사람처럼 생겨서 우리 애도 아시안 혼혈처럼 그렇게 생겼거든. 이 아이가 한국에 가서 일반학교를 다니면 차별을 당할까?" 라는 질문에 "아니야, 한국은 차별없는 다문화 사회야"라고 곧바로 말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요즘에도 한국이 해외로 많이 입양을 보내?"라는 질문에 "아니야, 그건 다 옛날 얘기야"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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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온 지 1년됐다고 짤막한 소감을 적으려던 것이었는데, 선거철이다보니 글이 이렇게 되었다. 다시 원래 목적으로 돌아가 얘기하자면, 지난 1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남자친구와 살림을 합쳐 새롭게 가족을 만들었고, 투닥투닥 싸운 날도 많았지만 어쨌든 서로한테 잘 적응한 것 같다. 결혼을 하지 않고 같이 살면서, 그리고 결혼은 언제 하냐는 물음과 잔소리 등을 들으면서, 결혼제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아직 결혼도 안하고 출산육아 계획은 더더욱 없지만, 어쨌든 그런 굵직굵직한 일들에 대해 남자친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런 것들이 우리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많이 생각해본 1년이었다.
그리고 스웨덴 무상교육의 혜택을 누린 1년이었다. 아직도 공부를 하고 있지만 돈 걱정 안하고 공부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무상교육이 사람들의 인생을 얼마나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지 목격한 1년이었다. '공부해보고 아니면 다른 거 하면 되지, 진로나 적성이라는 게 뭐 그리 쉽게 찾아지나. 뭐 어차피 학비도 안 드는데.' 하는 마인드, 그런 게 부러웠다. 그래서 왜 스웨덴, 스웨덴 하는지 알 것 같은, 그런 1년이기는 했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에 그리운 것들이 많다. 가족도 친구도 날씨도 음식도... 6월 휴가만 바라보고 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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