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가면서 자취를 시작하고 그 후로 약 8년을 혼자 살면서 고기 반찬을 스스로 해먹은 적이 별로 없다. 우선 고기가 정육점에서 사서 혼자 구워먹기엔 비싸기도 했고, 원하면 학교 근처에서 저렴하게 돼지두루치기 같은 걸 사먹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굳이 고기를 사서 직접 요리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 가기전 부모님과 같이 살았을 때에는 아버지가 집에 일찍 와서 저녁을 같이 먹는 날엔 꼭 고기를 먹었던 것 같다. 나도 같이 맛있게 먹은 적도 많지만, 어쩔 때는 고기가 너무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기도 했다. 그래서 대학교 2학년 때였나 3학년때였나, 이제 더이상 고기 냄새를 맡기 싫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은 것도 그 즈음이었다.(작가의 의도가 채식주의를 전파하려는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그리고 마침 동아리에 채식을 하는 후배가 들어와서 그 핑계를 대고 나도 채식을 실천해볼까 했었다.
엄격한 채식은 아니었고 그냥 고기를 점점 줄여보자는 생각이었으므로, 딱히 나의 식단변화를 눈치채는 사람도 태클거는 사람도 없었다.(회식 때 처음부터 된장찌개와 밥을 시키겠다고 하면 눈치를 좀 주긴 했지만...) 다만 뜻밖의 위기가 찾아왔는데... 4학년 때 일본으로 교환학생을 가서 그 학교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빈혈이니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병원에 갔는데 의사선생님이 굉장히 호들갑을 떨며 꼭 빈혈약 챙겨먹고 붉은 고기도 먹으라고 했다. 얼마나 겁을 줬던지, 그때부터 종종 의식적으로 붉은 고기를 챙겨먹기 시작했다.
사실 고기를 많이 먹게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남자친구였다. 사귄지 얼마 안되어서 저 빈혈사태가 일어났는데, 그때 그는 전화로 육류섭취의 중요성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는 아침을 제외한 식사에는 고기(또는 적어도 생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역국과 김, 계란 정도만 있어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이 친구는 라면 하나를 끓여도 거기다가 뭔가 넣어야 직성이 풀린다. 저번에는 라면을 끓이는데 냉장고에 육류가 아무것도 없어서 결국 잔멸치를 꺼내다가 넣더라... 덕분에 멸치라면을 맛보았다.
그리하여 스웨덴에 온 후로 나의 육류 섭취량이 확 늘었다. 남들은 환경공부하러 스웨덴에 오고, 스웨덴에 온 걸 계기로 채식을 시작하고 뭐 그렇다던데, 나는 오히려 스웨덴에 와서 고기를 확 먹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친구들을 만나면 삼겹살, 치맥을 먹었지만 스웨덴에서의 육류 섭취는 그것과는 쨉이 안된다. 처음에는 늘 배가 더부룩한 느낌이었지만 이제는 나도 적응이 되었는지, 그리고 뭔가 한식을 먹고 싶은데 제일 간단하고 쉽게 '생색낼 수 있는' 음식이 삼겹살 또는 제육볶음이라 그런지 여기서 삼겹살을 참 많이 먹었다.
내 안의 무엇인가가 변한 건 지난 여름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어떤 채식을 실천하는 분의 블로그를 보았다. 정확히는 기억이 안나지만 어쨌든 '동물의 사체를 입속으로 넣는 느낌이 싫다'는 문장이었던 것 같다. 육식을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해본적이 없어서 충격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냥 고기 냄새가 싫었고 먹고 나서 더부룩한 느낌이 싫었고 가끔 공장식 축산의 문제를 생각하며 양심이 찔린 적은 있었지만. 어쨌든 그 문장에 충격을 조금 받긴 했지만 곧 잊어버렸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스웨덴에 친구가 놀러와서 함께 스웨덴 전통 가재파티를 했는데, 가재를 하나 뜯어먹었을 때 문득 문장이 생각이 났다. 그 전에는 가재요리를 먹을 생각에 들떠있었는데, 갑자기 기분이 확 바뀌어서 더이상 이걸 보기도 싫고 먹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행 온 친구와의 즐거운 저녁식사를 갑자기 '이 가재가 너무 불쌍해보여서 차마 입에 넣을 수 없다'며 망치고 싶지 않았다. 아마, 신체부위를 먹는 육류와는 달리 이런 해산물은 통째로 요리해서 이렇게 직접 해체(!)하는 단계를 거치니 그 몸통 전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 전에도 멸치를 먹다가도 갑자기 멸치의 눈을 바라보며 의식하게 되면 그 후 며칠동안은 더이상 멸치볶음을 먹을 수 없었던 적이 있었는데 아마 같은 이유였을 것 같다.
어쨌든 그 후로 식탁 위 식재료를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다. 게다가 '고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는 더 그렇게 되었다. 고기를 끊지 못하는 어머니를 본 작가가 '도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고기에 집착하는지' 조사한 내용인데, 고기가 주는 감칠맛에 대한 묘사 같은 게 너무 훌륭해서 오히려 '육식을 조장하는 내용이 아닌가' 싶기도 했었다. 하지만 막상 다 읽고 나니 '아니 그러게, 왜 그렇게 고기에 집착했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는 버거킹에서도 채식버거를 주문해서 먹게 되었다. 스웨덴 햄버거 체인인 MAX에서 plant beef로 만든 버거를 먹어보았는데 정말 식감도 훌륭해서 진짜 고기로 만든 버거보다 더 맛있게 먹었다. 크리스마스 부페는 생선과 야채 위주로 먹었고, 어제는 몇몇 한국분들과 저녁을 먹었는데 일부러 고기가 들어가지 않는 메뉴를 골라서 준비했고 다들 맛있게 먹어주었다. 한번에 식습관을 바꾸기는 어렵지만 점점 이렇게 빈도를 늘려볼 생각이다. 새해 목표 중 하나.
하지만 유튜브 육식맨님이 이 글을 보시면 뭐라고 생각하실까. (참고로 그는 고기 요리 전문 유튜버로 입담이 뛰어나며, 매 영상마다 '아 저걸 나도 해봐야하는데'라는 마음과 '육식을 줄이기로 결심했는데' 하고 내적갈등을 일으키는 유튜버입니다. 구독 ㄱㄱ ... 채식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육식맨 홍보로 마무리되는 이상한 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