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이 찾아왔다. 그 동안 '매우 바쁜 평일 -> 조금 느슨한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 다시 그 다음 주를 대비하느라 바쁜 일요일'을 반복하며 지치기도, 맥주와 수다로 기분을 풀기도 했지만 2017년 이래 이렇게 감정기복이 심한 적이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해야할 게 많은데 하려고 하면 짜증이 나고, 그걸 집사람한테 토로한답시고 이야기하다가 결국 울음이 되고 그랬다. 행복하냐고 묻는 질문에 그런 낯간지러운 질문 다 집어치우라 대답하고, 기분이 어떻냐는 질문에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답했다. 이 힘든 시기를 견디면 너에게 좋은 직장과 즐거운 날들이 찾아올 거라는 말에 당장 다음 주를 상상하는 것도 벅찬데 2년 후를 생각하는 건 너무 힘이 든다 답했다. 그런 대답을 들으며 위로해주는 사람도 지쳤고, 나 역시 말하면서도 '나는 왜 이럴까' 탓하며 기운이 더 빠지는, 펜을 들기도 힘든 그런 날들이었다.
다행히 집사람은 굉장히 솔직해서, 나를 위로한답시고 자기가 지치는 걸 숨기거나 나에게 무조건 잘해주려하기보다는, '너의 이런이런 말을 들으면 내 기분이 안좋아진다'고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내 기분에 휩싸여 내 생각만 하고 있을 때에는 그런 말들조차 감당하기 힘들고 기분이 나쁘지만, 약간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그의 지친 얼굴이 보였고, 그가 이틀 연속 밤샘근무를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여름에 두달동안 한국 가서 놀다 온 나와는 달리, 코로나 때문에 모든 여행이 취소되어 아무데도 못가고 지루한 한 해를 보내고 있는 그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하루에 8시간 이상 공부하지 않기로 다짐을 하고 하루 중 여가시간을 무조건 따로 낼 것을 다짐했다. 다음 주에 시험이 두 개 있어서 지난 주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지만 - 그래서 정말 말도 안되는 벼락치기 플랜을 스스로 세우고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 그것 역시 이번에는 너무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다짐한 지 하루도 안되어서 토요일에 '그래도 시험기간인데 하루종일 공부를 해야하지 않을까'하고 잠깐 생각했지만, 딱 여섯시간 공부하고 저녁 내내 요리하고 게임하며 시간을 보냈다. 일요일은 처음으로 방탈출게임을 예약해서 남친과 다녀오고 외식을 하며 하루를 충전했다. 어제는 낮에는 집에서 공부를 했고, 저녁은 이것저것 다른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낮에 학교에서 친구와 공부를 하고, 저녁은 다른 친구와 집에서 먹고 수다를 떨었다. 물론... 이 모든게 가능했던 건 이번주와 다음주가 시험기간이라 과제가 없었기 때문이긴 한데, 한편으로는 '내가 그동안 얼마나 시간관리를 못했나' 반성하기도 했다. 시간을 쪼개어서 많은 걸 하는 게 시간관리라고 생각했지만, 충분히 잘 쉬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시간관리를 잘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아직 배울 게 많다.
충분히 쉬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쉬기로 한 시간에 다른 생각 안하고 잘 쉬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내가 그걸 진짜...못한다. 쉴 때 자꾸 '다른 할 일'이 생각나고 스트레스를 받는데, 아무 생각없이 잘 쉬었던 게 인생에서 언제언제였을까 생각해보았다.
- 재수할 때 : 낮에 도서관에서 친구와 공부하고 저녁에는 집에서 책보고 드라마보고 블로그하며 노는 일상이었다. 재수생이면서 저녁에 노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자신에 굉장히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나는, 일과 휴식시간을 구분할 줄 알았던 것 같다.
- 20대 대학생 때에도 그렇게 '할 일에 대해 집착하고 걱정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 학점을 생각하면...
- 2016년에 스웨덴 막 왔을 때만 해도 그렇게 조급하고 걱정하지는 않았는데.....
아, 2016년 11월에 SFI 끝나고 나서부터 세상의 모든 고민이 다 내 것인것처럼 느껴지면서, 지금 뭐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 굶어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나의 이 '빨리빨리 많이많이'병이 시작된 것 같다. 2017년 초에 알바를 구하기 시작하면서 그게 더 심해졌던 것 같다. 뭐랄까, 내 안에서는 '봐,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까 이렇게 알바도 구해졌잖아. 더 열심히 하면 더 좋은 일이 생길거야'라는 생각이 늘 있었던 것 같다. 열심히 하면 좋은 일이 생기는 건 맞는데, 내 몸을 돌보고 기분을 돌볼 생각은 못한 게 문제였다.
2017년 가을에 아주 세게 번아웃이 한번 왔고, '내가 마음먹은대로 몸을 200프로, 300프로 굴릴 수는 없는 거구나'하는 걸 깨달았고 2018년과 2019년은 '안빈낙도 복세편살'을 마음에 새기고 좀 단순하게 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일을 줄였고, 공부에 집중했고, 학교생활을 내가 잘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별로 없었어서 재시험을 보게 되어도 그리 실망하지 않았다. 공부를 열심히 하긴 했지만, 과제를 제때 낼 수 없게 되어도 자책하지 않았고 그 다음 수업 때 조교한테 더 많이 물어봐서 다음에 통과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외국인이고, 나는 이런 공부가 처음이고, 내가 처음부터 모든 걸 잘 할 수 없어도 그게 내 탓은 아니라고 집사람이 꾸준히 말해줬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2019년을 지나면서 마음이 좀 편해지고 몸이 편해지니 2020년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이제 학교생활에 적응해서 생활이 편한 것 같은데 일을 좀 늘려볼까' 그래서 일을 많이 했다. 학교 과제도 기왕이면 다 한번에 통과하고 싶어서 열심히 했다. 시험도 거의 한번에 통과하다보니 '재시험은 이제 용납하지 않는다'는 자세로 시험공부를 했다. 그게 번아웃을 또 불렀다. 2018년과 2019년의 내가 좀 편했고, 즐거웠고, 과제 재제출과 재시험에도 여유가 있었던 이유는, 내가 '적당히' 일했고 '적당히' 공부했고 '잘' 쉬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일상의 밸런스를 맞춰야한다는 주변의 충고를 우습게 보다가 또 이렇게 지치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면, 주변 사람들이, 또는 블로그를 보시는 분들이 칭찬해주시는 말들이 좋기도 했다. '어쩜 그렇게 부지런해요', '어떻게 그렇게 빨리 잘 해냈어요', '나도 블로그 읽고 더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어요' 등등. 그래서 더 많은 걸 잘 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건강을 망치고 기분을 망치고 자존감을 잃는다면 다 부질없는 일이다. 혹시라도 내 블로그를 보고 '저 사람은 저렇게 사는데 왜 나는...'하는 분이 없었으면 좋겠고, '나도 더 바쁘게 살아야지'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고, '저 정도로 해야 저렇게 되는구나 그럼 나도...'하는 분이 없었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 템포 말고, 자기 템포를 생각하고 오늘 내 하루를 내 방식으로 즐겁게 만드는 게 최고다.
휴식을 취하는 자신을 '게으르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지금 쉬지 않는다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야 많겠지만, 결국 나중에 병이 나서 더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는 것. 옆에 있는 사람이랑 즐겁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걸 늘 생각하고 지키려고 노력하는 게 이번 주 목표다. 그렇게 해서 그게...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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